“70년의 일상에 빛을 비추고 싶었어요.”
사진 하영 찍으면 혼 나간 덴 허는디…
내 할머니는 평생을 혼자 사신 분이다.
아버지를 낳으시고 청상은 아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소박데기로 여생을 사시다 가셨다. 할머니 살아생전에 잊혀지지 않은 한 장면이 있다.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 마당이었다고 기억하는데 할머니는 한복을 어색하지만 곱게 차려 입으시고 사진기 앞에 앉으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영정 사진 촬영이 아니었나 싶다.
코카콜라를 ‘검은술’로 기억하시는 할머니 살아생전에 사진 속에 담길 일이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할머니는 사진을 찍는 내내 어색하고 불편해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사진기를 눌러대면서, 사진을 찍어둬야 나중에 손자들도 얼굴을 기억하고 식게 멩질에도 할머니 얼굴 한번 볼 수 있지 않겠냐고 어르고 달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어색한 듯 수줍은 듯, 한 소리를 하셨다.
‘사진 하영 찍으면 혼 나간 덴 허는디…’
지금은 할머니의 기제사를 내가 모시고 있는 탓에 그때 그 한 장의 영정 사진이 늘 내 방 한 켠에 놓여 있어 할머니 혼이 담긴 얼굴을 마주 대하곤 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야 스마트폰이다 뭐다 해서 사진 찍는 일을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폰에 담고, 그보다 더 쉽게 삭제하고 말지만 할머니 시대의 사진 한 장 찍는 일은 혼을 나누어 갖는 일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와 혼을 공유하는 일, 참 서늘하면서도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할머니 식으로 사유하면, 내가 나무를 찍는다는 일은 나무의 영혼을 잠시 내 안에 들이는 일이 되는 것이고, 내가 내 친구의 사진을 찍으면 그 친구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셈이다.
증명사진을 찍거나, 아니면 장수사진 혹은 영정사진을 찍는다고 가정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는 사진기라는 매개가 있지만 잠시 상상 속에서 사진기를 지워버리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사연이 놓여 있길래 그렇게 진지하게 마주보면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사진을 찍히는 사람들의 어디를 보면서 무엇을 찍고 싶어 하는 것일까?
삼촌, 여기 보십서, 웃으십서
박정근이라는 사람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고, 더욱이 사진에 대해서라면 문외한인 내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가 쓰겠다고 수락을 했으니 쓰고 있을 터인데, 이즈음에서 건방진 얘기 한 마디 하자면, 제주의 예술판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장르를 불문하고 만약 내가 일말의 도움이 된다면 염치 불구하고 디딤돌로 쓰라는 흰소리를 술자리에서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아마 그런 자리에 그가 있었고 그런 인연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따지고 보면 전혀 일면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8년 그러니까 제주4․3 70주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4․3평화공원 추모공간에서는 희생자 명부에 오른, 1만4천이 넘은 억울한 원혼을 위무하는 해원상생굿이 장장 일주일에 걸쳐 치러졌다. 그야말로 일뤠굿인 셈이다. 굿이 이루어지는 제청 옆으로 부스가 설치되었는데 그 중 한 부스의 현수막이 시선을 끌었다. ‘옛날사진관’
안으로 들어서니 소박하게 꾸려진 이동식 사진관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마침 안면 있는 후배가 있어 후미진 자리에 앉아 잠시나마 ‘옛날사진관’을 훔쳐볼 수 있었다. 띄엄띄엄 부스를 찾는 ‘손님’들이 있었다. 혼자 오시는 손님도 있었고, 벗인지 궨당인지 두어 명이 들어오시기도 했다. 부부지간인지 남녀가 같이 들어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초로인생을 뒤로 하고 노을 지는 저녁의 들녘을 아슴하게 바라보는 연배의 어르신들이었다는 점이다. 4․3 관련 행사장을 두루 다녀본 사람이라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희생자 유족분들이시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들 손에 화이트보드가 들려 있는 게 눈에 띠었다. 나중에 사진이 인화되면 돌려드리기 위해 연락처를 포함해서 돌아가신 희생자들에게 남기는 한 마디를 적어놓으신 글판이었다. 이승에서 못 다한 한 마디를 적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고민 고민하시다가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를 수차례 하신 다음에야 화이트보드를 가슴에 안고, 어디에다 시선을 둬야할 지 몰라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아버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먹먹하게 지켜보았다.
앉아 있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사진에 찍히는 사람과 사진을 찍는 사람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우연치 않은 기회를 맞아 민망함을 무릅쓰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망실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셔터를 누르는 사람이 연신 ‘여기 보십서, 웃으십서’를 반복한다.
아니, 무슨 돌잡이를 들고 어르고 달래면서 돌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고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앉혀놓고, 그것도 ‘조반상 받아들고 잠시 갔다 온다는 게 영영 저승길이 되어버린’ 희생자 유족들에게, ‘간 날 간 시를 몰라 난 날 난 시에 메밥을 올리는’ 희생자 유족들에게, ‘살아생전에 얼굴 뵌 적이 없어 꿈에 다녀갔는지조차 모르겠다는’ 희생자 유족분들에게 ‘웃으라니?’ 대체 이건 뭔 소린가?
그때 유족들 앞에 서서 셔터를 누르면서 여기 보시라고, 웃으시라고 반복해서 말하던 그 사람이 바로 박정근이었다.
박정근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제주에 오면 보통 많이 듣게 되는 것이 4․3이죠 저도 2012년에 처음 제주에 내려오면서 자주 듣게 되었어요. 그 전에 선배들 사진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고요. 그러던 중 4․3 70주년을 맞아 7일간에 걸친 해원상생굿이 대규모로 진행될 때 ‘옛날사진관’이라는 프로젝트에서 유족의 초상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우연히 참여했는데 마치고 보니 300명이 넘는 유족들의 입에서 한 올 한 올 풀려나오는 기억과 한탄의 실타래를 제가 어느덧 마주하고 있더군요. 유족들이 희생자에게 보내는 짧은 글에 담긴 비애는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고 묵직했죠.”
“일주일 동안 고승욱, 박선영 작가와 서로 역할 분담을 하여 기록을 했는데 작업을 모두 마치고 나니 각자 무언가를 하나씩 손에 들고 있게 되었어요. 작업이라는 게 열심히 기획을 해서도 시작이 되지만 우연한 기회에 이렇게 훌쩍 진행되는 경우도 있더군요.”
이내 먹먹해져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그의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에 있다.
기본적으로 4.3 70주년 행사에서 촬영한 3백 분의 어르신 중 그 일부를 추려내어 다시 연락을 드렸고, 그분들이 사시는 마을, 이를테면 북촌리, 의귀리, 고성리, 가시리 등 마을 경로당에 간이사진관을 마련하고 인터뷰와 함께 초상사진을 백여 분 정도 더 찍었다.
그 사진들을 7미터 높이의 벽에 100x140cm 정도의 크기로 모자이크처럼 걸어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게 준비한 게 이번 전시의 주요한 컨셉이고, 한 가지 추가된 게 있다면, 비록 일부이지만 그 무지막지한 70년 세월을 때로는 버팀목이 되고, 때로는 목발이 되고 때로는 의족이 되어 함께 그 험한 세월의 강을 굽이굽이 훠이훠이 건너 ‘살단보난, 살암시난’ 마침내 여기까지 오신 부부 사진을 새로 준비했다는 점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진하는 사람이 앵글 앞에 선 사람을 보면 수평도 잡고 어른의 삐뚤어진 몸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촬영을 하면 할수록 참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삐뚤어지고 거친 저 표정, 저 손, 저 몸이 다름 아닌 4․3 70년을 아로새긴 그분들만의 문장(紋章)이란 생각을 하게 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드리던 ‘주문’의 말씀은 점차 줄어들고 나중에는 이야기만 듣게 되더라구요.”
“카메라 앞에 선 두 분 또한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본 경험들이 별로 없으셔서 굉장히 불편해 하시는 모습들을 그냥 담았어요. 배경은 그분들을 위로하는 장소이거나 인생의 기념이 될 만한, 남기고 싶은 장소들인데 그분들께서 직접 정했구요. 학교 운동장 세종대왕 상 앞, 국가 유공자비 앞, 마을 초등학교 등 어른들께서 자신만의 특별한 장소를 정해 주시면 그 곳에서 찍었어요. 그분들만의 70년 세월이 아로새겨진 일종의 문신 같은 공간이잖아요. 저는 그냥 찍기만 했어요.”
“일상이 깃든 공간을 찍으면서, 이 분들이 그 큰 비극을 겪으시고도 일상을 지키신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4․3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말도 안 되는 일이 평소처럼 밥 먹고 맛난 과일 찾아먹고 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그걸 홀로, 그리고 결혼 후에는 부부가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며 70년을 지키신 거잖아요. 뉴스나 신문을 봐도 4․3 하면 보통 유족들이 우는 모습만 나오더라구요. 이렇게 아픔을 부각시키느라 의도치 않게 묻혀버린 그 70년의 일상에 카메라로 빛을 비추고 싶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부질없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제주에서 해마다 열리는 4.3 사진전을 부러 찾아가곤 하는데 왁자한 오프닝에는 가능한 피하고 오롯하고 조용한 시간에 전시 공간을 찾는 버릇이 있다. 전시된 사진의 이면에 감춰진 것들과 만나기 위해서다.
북촌 팽나무가 찍힌 사진 속에선 어김없이 한겨울의 맵찬 바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외자기는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선연하다. 차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쇳소리도 들린다. 쇳소리가 잠시 쉬어갈 즈음 까옥까옥 까마귀의 검은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옴팡진 밭을 찍은 사진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멜젓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박정근의 전시물, 초상(肖像)들에서는 외로움이 물씬 풍긴다.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부모를 잃은 외로움! 어찌 그 깊은 슬픔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들의 용모에서 그의 어머니를 만난다. 그의 아버지를 만난다. 그의 삼촌을 만나고 어린 누이를 만난다. 사진은 한 장이지만, 아니다.
그 사진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이와 삼촌이 겹쳐 있다.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있고 아버지의 통곡이 있고, 삼촌의 뒤집힌 눈망울이 있고, 누이의 숨넘어가는 비명소리가 있다.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떠 사진에 눈길을 준다.
그가 보인다. 사진 속, 지금의 그녀가 보인다. 차마 언설로 다하지 못할 70년의 나이테가 보인다. 70년 동안 흘린 눈물자국이 보인다. 한때 가족이 희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던 그와 그의 가족이 보인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면서 함께 삶을 지탱해온 가족이 보이고, 그들의 어린 손자손녀들이 어룽거린다. ‘살암시난 살아진’ 어느 집안의 굴곡진 가계(家系)가 보인다.
다시 사진을 본다. 그들의 눈부처에 사진을 찍는 작가가 보인다.
입으로는 ‘여기 보시라, 웃어보시라’ 하지만 이내 먹먹해져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셔터에 손이 가는 박정근이 보인다. 그의 미세한 손떨림이 보인다. 들릴 듯 안 들릴 듯 그의 숨소리가 들린다.
충북 음성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한 반에 스무 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 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이 보인다. 담임선생님이 취미 삼아 사진 찍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거, 참 재미있겠다고, 나도 커서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마음 먹는 어린이가 보인다.
고등학교 2학년 즈음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사진 관련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사진학과가 있다는 걸 처음 알고 서울로 올라가 사진을 공부하게 된 아이가 보인다.
어려서부터 고향 마을 충북 음성의 꽃동네라는 천주교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아이가 보인다. 불편한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 젊은이가 보인다. 단지 카메라에 담는 일만이 아니라 미주알고주알 그들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들어주고 차곡차곡 기록하는 그가 보인다.
우연한 기회에 제주로 흘러 들어와 저승 가서 돈 벌어 이승에 사는 새끼들 먹여 살리는 해녀할머니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그가 보인다. 제주현대미술관에서 레지던시에 참여한 그가 보인다.
생각해보면 4․3 희생자 유족들이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해녀할머니들이나 몸과 마음이 아픈 장애우들이나, 민초들은 역사를 배우지 않는다. 그들의 삶이 곧 역사이기 때문에 굳이 역사를 배울 필요가 없다.
저들의 삶이, 저들의 표정이, 저들의 이목구비가 제주의 역사요 우리의 현대사다. 저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저들의 표정을 읽어내는 것이, 저들의 이목구비에서 저들의 혼을 찾아내는 것이 나의 역사요 우리의 현대사다. 하여 박정근의 사진은 제주의 역사요 우리 시대의 ‘지금, 여기’에 다름 아니다.

이상협의 아빠이병남 엄마임미자_2019_Pigment print_140x100cm_ⓒ박정근

고생상의 아빠고태식 엄마장두선_2019_Pigment print_140x100cm_ⓒ박정근

조근섭의 아빠조희권 엄마이영애_2019_Pigment print_140x100cm_ⓒ박정근

이상언의 아빠이승도 엄마한춘자_2019_Pigment print_140x100cm_ⓒ박정근

서희경의 아빠서은새 엄마문정심_2019_Pigment print_140x100cm_ⓒ박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