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리용사 오태경_100x140_피그인 플레인_ⓒ 박정근_2018

info
×

오태경의 생애

오태경은 1931년 2월 21일 가시리 2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지만, 작은 어머니 아래서 컸다. 2남 3녀 중 넷째로, 형 한 명과 두 명의 누나, 여동생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랜 투병생활 끝에 태풍 사라호 오던 추석날 돌아가셨고, 형은 4・3 당시 행방불명, 형수님은 어린 조카와 전주 형무소 수감생활을 하다 돌아왔다.

1948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10월 15일 가시리에서 군경의 첫 방화로 30여명이 죽었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소개령이 내려지자 오태경 가족들도 산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겨울산의 혹한과 굶주림에 지쳐 토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절간고구마 창고에서, 표선 중학교에서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하지만 12월 15일에는 토산에서도 학살이 일어났다. 군경은 토산의 18세-40세 남성들을 뽑아 표선초등학교 쪽에서 총살했고, 20-30여명의 젊은 여자들이 끌려갔다. 12월 22일에도 산에서 토산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집합시키고,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이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부르며 76명의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 다음날에도, 이후에도 학살은 이어졌다. 오태경은 그 당시 17세였지만, 키가 작아 나이를 8살이나 줄여 말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토벌대를 따라 다니며 연락병 노릇을 하면서, 토벌대를 따라 순찰을 다니면서 양식을 조금씩 얻어먹고 살았다. 토벌대가 토굴에 불을 놓고 사람들이 나오자 군경은 그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오태경은 그 시체를 운반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태경과 가족들은 1949년 1월말 경찰의 허가 아래 다시 표선으로 가게 되었다. 표선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와 대바구니를 만들어 쌀과 바꿔먹고 살았다. 그러다 가시 마을이 재건된다고 해 가시리로 올라와 전략촌에서 살았다. 무장대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성담을 쌓았고, 움막을 간신히 지어 살았다. 성담에서는 보초를 서야 했다. 그렇게 살다가 1950년 19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오태경은 해병대 3기를 지원하려했지만 시기를 놓쳐 집안일을 돕고 있던 중,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가시에서 20여명이 성산서국민학교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고, 바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관리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자들을 인솔해 육군 제5훈련소 김녕 교육대대가 있는 김녕국민학교로 데려간다. 영문도 모르고 표선에서 김녕까지 4시간을 걸어 따라가자 작업복과 군화를 받았고, 머리를 밀어야 했다. 그렇게 집에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군인이 되었다.

9월 1일 입대식이 이루어졌고, 일주일 후 삼도동의 옛 제주농업중학교의 육군 제5훈련소 제5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은 다음 10월 1일 제주항으로 이동해 LST라는 미국 군함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다. 부산에서 훈련을 받다 화물열차를 타고 조치원을 거쳐 청주로 이동, 30연대 1대대 제3중대 제3소대의 소총수로 배치되었다. 소총 사용법을 익힌 뒤 봉화군 춘양면으로 이동해 태백산맥에 준동 중인 공비를 토벌하러 가게 된다. 봉화는 공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 여러 번의 전투가 진행되었다. 부대는 꾸준히 최전방에서 전투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수류탄을 맞아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오태경은 부대로 복귀해 바로 전투에 참가했다. 강원도 여러 지역을 오가며 교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중공군의 습격을 받아 백병전이 벌어졌고, 팔에 총검을 맞게 되었다. 다행히 위생병이 발견하고 달려와 치료받을 수 있었다. 중상이었던 오태경은 날이 밝자 경주의 육군병원에서 2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다가 부산 원호로 옮겨졌다. 병원에서 상병을 달았지만 현역 복귀가 불가해 1951년 7월 15일 명예제대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함께 떠났던 20여명의 가시리 사람들 중 돌아온 이들은 오태경 외에 2명에 불과했다.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을은 4・3의 여파 속에 있었다. 이전의 집이 아닌 전략촌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사랑이 싹텄다. 같은 마을 출신인 부인과 마을 보초를 함께 서면서 이야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연애를 하게 되었고, 23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들 셋, 딸 셋 육남매를 두게 되었다.

배곯지 않는 삶을 위해서 아내와 열심히 일했다. 돈이 되는 고구마와 유채 농사도, 양식을 위한 조와 보리농사도 꾸준히 지었다. 촐도 베었고, 남의 소를 키워 새끼를 얻는 번작을 해서 소도 얻었다. 고구마와 유채 장사도 했고 비료 창고의 조합장을 맡기도 했다. 열심히 일한 끝에 지금까지 자식들 키우며 잘 살 수 있었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마을의 개발위원이나 개발위원장 활동도 하고, 노인회 활동도 오랜 기간 해왔다. 그리고 2017년 마을에 4・3길이 조성되면서 마을 추천으로 4・3문화해설사가 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4・3 관련 증언과 인터뷰, 방송 출연도 여러 번 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증언은 미국에서의 증언이었다. 2017년 유족회에서 찾아와 4・3을 세계로 알리기 위한 증언자로 오태경이 선정된 것이다. 87세의 나이로 장시간 비행이 쉽지 않았지만 그는 미국에 가서 4・3을 증언했다. 미국의 책임이 있는 4・3을 미국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새로웠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역사가 울면서 통역하자 미국 교수를 비롯한 청중들이 울기 시작해 울음바다가 되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는 현재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그 시절을 버텨낸 대견한 자신을 칭찬했다.

오태경은 지금도 가시리를 찾아온 이들에게 4・3을 알리고 있다.

「엿가락과 담배연기」(2021)

제주 4.3 피해자이자 한국전쟁 참전 용사인 오태경 할아버지의 기억을 되밟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구분에 도전한다. 한국전 당시 유일하게 할아버지의 지친 영혼을 보듬는 기호품이었던 엿과 담배는 작가가 현재와 근현대사, 개인과 국가, 적군과 아군, 피해자와 가해자(...무한 말줄임)의 뒤섞이고 뒤엉킨 서사와 해석으로 타넘어 들어가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엿과 담배연기는 역사적 실체와 기억의 흐물거리는 뒤엉킴과 닮았다. 겉으로 보기에 단단한 엿가락에는, 조청을 길게 늘였다가 다시 겹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형성된 정형, 비정형의 무수한 공기구멍이 들어차 있다. 담배연기는 입과 코로 스며 나와 정확한 출처를 알기 어렵고 주변으로 퍼져 사물의 경계를 뭉그러뜨린다. 엿가락과 담배연기는 성형이 쉽기도 하다. 여름 한낮이면 엿은 깔끔하게 반으로 잘라지지는 않지만 쉽게 휘기 때문에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정확히 출처를 특정하기 어려운 담배연기는 입속 동굴과 혀를 거쳐 여러 모양의 연기로 배출된다.

작가는 엿과 담배연기의 물성(物性)을 통해 정의짓기와 경계짓기에 익숙한 우리를 찌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과 사물은 결국 ‘짓기’의 결과물이다. 문제는 방식이다.

첫 전투.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감고 마구 총을 쐈다. 점차 군인 정신이 들면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info
×

피우면 여자 생각 안 나게 하는 약이 들어있다던 화랑담배를 보급 받았다. 시간이 나면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곤 했다.

info
×

전장이 이동하면 매번 참호를 파야했다. 꽝꽝 얼어있는 겨울 강원도의 땅을 야전삽 하나로 매번 파곤했다

info
×

손가락을 잃고 부산 야전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을 나가 매일 엿을 사먹곤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모두 엿과 바꾼 결과, 살이 올랐다.

info
×

잃어버린 손가락 _100x140_피그인 플레인_ⓒ 박정근_2020

info
×

잃어버린 마을 _100x140_피그인플레인_ⓒ 박정근_2018

info
×

빨간 나무 _100x140_피그먼트 프린트_ⓒ 박정근 _2019

info
×

겨울 _100x140_피그인플레인_ⓒ 박정근_2020

info
×

미군에게 4・3 책임이 크다. 미군의 책임 소재를 묻고 따져야 한다.

미군이 준 군복, 보급품으로 한국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info
×

 93세 오태경_100x140_피그인 플레인_ⓒ 박정근_2020

info
×

예미산 _100x140_피그인 플레인_ⓒ 박정근_2019

info
×

엿가락과 담배연기

할아버지는 엿과 담배를 좋아하셨다. 뜨거운 여름날 사방으로 휘어지던 엿가락과, 할아버지의 코인지 입인지 혹은 눈이었는지 모를 곳에서 스미어 흩어지던 담배연기의 끝에는 뜻밖에도 한국전쟁이 있었다. 제주 4・3이 궁금해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다.

오태경 할아버지는 제주 4.3 피해자이자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다. 할아버지가 경험하신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투와 수난의 ‘역사’와는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다. 전쟁에도 일상과 희노애락이 존재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대의와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 속에 가려진 인간이 존재했다. 첫 전투에서는 피와 죽음이 무서워 덜덜 떨었지만, 점차 ‘나라를 지키는’ ‘군인정신’이 들어 무섭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강조하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투 이야기가 무르익어 살육이 연상될 즈음이 되면 할아버지는 화제를 급전환해 꽝꽝 얼었던 차디찬 주먹밥과 주머니에 넣어두고 조금씩 뜯어 먹던 커다란 건빵, 미군들이 건네준 너절한 옷가지와 같은 말랑말랑한 일상 이야기를 꺼내곤 하셨다. 왜 하필 매번 그 순간이었을까. 할아버지의 난데없는 서사 전환은 까맣게 지우고 싶었던 끔찍한 기억을 너무나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기억으로 덮고 싶었던 <무의식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 정체성은 역설적이었다. 4・3에서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한국전쟁에서는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운 용사였다. 엇갈리는 정체성은 ‘국민을 지켜주지 않고 폭력을 행사한 나라에 대한 비난’과 ‘지켜야 했고 잘 지켜낸 나의 나라’라는 상반된 감정의 공존과 부딪침을 동시에 가져왔다. 이야기에서 묘사되는 전쟁도 양면적이었다. 국가가 지시하는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은 고귀했고 영웅적이었다. 하지만 4・3 피해자들에게 전쟁은 사악하고 끔찍했다. 반대도 동시에 성립했다. 한국전쟁은 사악하고 끔찍한 일이었지만 4・3은 고귀하고 영웅적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이 모든 것이 혼재하며 뒤섞여 있었고, 한국전쟁과 4・3 역시 별개의 사건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기억의 역설은 나에게 질문으로 돌아왔다. 당시를 살았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닫혀있는, 이미 완료된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해왔지만 할아버지에게 전쟁은 현재의 경험이자 여전히 구성 중인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한국전쟁은 나에게도 또 다른 형태의 현실로 떠올랐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해 벌어진 동족상잔의 끔찍한 전쟁,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분단과 휴전을 만들어낸 전쟁이라고 역사의 연대표에 뚜렷하게 기입된 (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한국전쟁은 이제 나와 다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50년의 할아버지가’ 누비셨던 전국의 전장을 ‘2021년의 내가’ 되밟아 찾아갔다. 연결고리는 할아버지 기억의 닻이었던 몇 가지 사물이었다. 할아버지가 숨어서 마음을 졸이고 있던 마차리의 나무였고, 전쟁 중에 한 마을에서 얻어먹었던 따뜻한 소고기 국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던 경주를 찾아서는 안압지와 왕릉을 닻으로 삼아 할아버지가 치료를 받고 산책하시던 1950년 경주의 지도를 그렸다. 할아버지가 전투를 치렀던 강원도 예미산을 올라 흙을 밟고 돌을 하나 하나 돌아보며 마음을 끄는 것들을 수집했다.

오태경 할아버지는 전장에서 자신을 위로했던 사물로 엿과 담배연기를 꼽으셨다.

엿가락을 반으로 ‘똑’ 부러트려 단면을 본 적이 있는가. 겉으로 보기에 단단한 엿가락에는, 조청을 길게 늘였다가 다시 겹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엿으로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정형, 비정형의 무수한 공기구멍이 들어차 있다. 빨대삼아 불면 반대편으로 바람이 제법 세게 나올 정도로 구멍이 ‘숭숭’ 뚫려 공기가 들고 난다. 담배연기는 입과 코로 스며 나와 출처를 알기 어렵고 주변의 사물로 퍼져 경계를 뭉그러뜨린다. 주변 사물, 현상과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엿가락과 담배연기와 같다. 얼핏 견고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호하게 뒤엉켜 있어 명확히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없다.

엿가락과 담배연기는 성형이 쉽기도 하다. 여름 한 낮, 엿은 깔끔하게 반으로 잘라지지 않지만 쉽게 휘기 때문에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 담배연기는 얼굴의 어느 부분이 출처인지 정확히 특정할 수 없지만 마음먹으면 구름을 입 속에서 띄어 내보낼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일부 요소를 선택적으로 강조하거나 지워버림으로써 (비)의도적인 미화까지 가능하다.

아군과 적군

제주 4・3과 한국전쟁

일상과 전투

가해자와 피해자

군인과 민간인

용맹과 무력함

희노애락과 이념

1950년과 2021년

할아버지와 나

.

.

.

우리의 인식 속 사물, 사건, 인물은 엿가락과 담배연기처럼 경계가 모호해서 구분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가변적이어서 상황에 따라 이리도 저리도 돌려 입어 나를 방어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엿과 담배연기의 물성(物性)은 정의짓기와 경계짓기에 익숙한 우리의 실제를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과 사물은 결국 ‘짓기’의 결과물이다. 문제는 방식이다.

Using Format